대한민국에서 정권이 바뀌게 되면 힘을 쓰던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부정부패 혐의로 법정에 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 상반되는 감정을 느낍니다. 불의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한다는 당위성에 동의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위법이기는 하지만 관행을 따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정심을 느끼곤 했습니다.

과거의 일로 재판을 받을 때 대부분의 피고는 검사의 질문에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으로 대응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면 언론에서는 책임을 회피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진실로 기억을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전에 한 번 스쳐간 사람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오래 전 돈 얼마를 주었거나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을 사소한 내용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의 증언은 필시 조작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만일 그런 혐의로 재판정에 선다면 전 틀림없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지난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편 변호사나 검사가 집요하게 물어오면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항복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과거에 한 말이나 행적을 갖고 따지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말이란 것이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것이 아니고, 기억도 사진처럼 정확한 것이 아닌 것인데, 옛날에 한 말이나 행적의 사실 여부를 가리자고 덤비면 자신을 방어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남이 한 말을 거두절미하고 인용하는 사람도 두려워합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친한 사람에 관하여 부정적인 말을 했다고 합시다. 친한 사람이라고 해서 결점이 없으라는 법이 없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말에 꼬투리를 잡아서, 겉으로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싫어한다고 떠들고 다닌다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변호하겠습니까? 이럴 자신이 없어서 발언이 잘못 인용될 수 있는 신문 인터뷰 같은 것도 피해 오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살지 아니하고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은 상호간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의사 표시가 항상 정확한 것이 아니고, 의사소통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 믿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안 되더라고 교회에서는 이것이 되어야합니다. 교회에 이러한 푸근함이 사라질 때에 그 교회는 성령님이 아니라 율법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