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얘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카톡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위한 예언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읽어보니 우리 가정 상황과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목사님이 자신의 생각을 적어 보낸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그대로 적었다는데, 저를 ‘나의 귀한 종’ ‘나의 사랑스러운 종’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를 보낸 목사님은 제 겉모습만 보니까 ‘귀한 종’ 혹은 ‘사랑스러운 종’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저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부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낸 준 메시지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종, 사랑스러운 종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내가 진정 하나님에게 귀한 존재이고, 사랑스런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 존재 자체가 귀하거나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귀하고 사랑스럽게 비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우리 모습은 실제 모습과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았다’(롬 5:1)는 사도 바울의 말이 예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우리 모습과 자신이 보는 모습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에게 진정 귀한 종이고, 사랑스러운 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는 말의 의미가 점점 더 마음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사랑하는 것이 어렵고,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과 반대입니다. 이러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인간을 사랑하고 높일 핑계를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밧세바와의 간음이 한 예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높이실 핑계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하는 모습,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모습만 눈에 들어와서, 마음에 합당하다고 선포하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해 준 곳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주저앉은 것을 보면 그의 마음에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거짓말하는 사건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높여줄 핑계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려는 노력을 보시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신 것 같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주위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로 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적인 표현을 빌자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우리가 의로운 사람, 믿음의 사람,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천국의 상급을 기대합니다. 사실 저는 상급을 받기는 커녕 꾸중을 들어야 합니다. 충성한다고 하지만 게으를 때가 더 많습니다. 진정한 주의 종은, 주인이 원하는 곳에서, 주인이 원하는 것을, 주인이 원하는 방법대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저 자신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방법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종 노릇을 제대로 했던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욕구도 하나님이 주셨고, 능력도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사실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상급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핑계 때문입니다. 잘못했던 것은 기억하지 않고 잘했던 것만 기억하며,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상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답고, 더 지혜로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 감탄하게 되고, 더 경외하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미 구원받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고 적었는지 알겠습니다(엡 1:17).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무한한 미지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고, 알면 알수록 더 경이롭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