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성명을 밝히지 않고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보내왔습니다.
“목장에서 기도할 때에 놀란 점은, 너무나도 천편일률적으로 자기 주변 내지 본인의 아주 조그만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사회나 인류를 위한 마음씨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변했습니다, 교회가.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조금 그럴싸한 일이 생기면 모두 기도 응답이라는 식의 비상식적이고 기본적인 합리성마저 결여된 사고 체계에서는 현재를 사는 인간의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웃음이 났습니다. 약 30년 전 믿지 않던 저 자신의 말을 듣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시작하여야합니다. 사회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대상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것은 가까운 이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이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랑을 연습하여 가면서 범위를 확대해가야 합니다. 나라와 인류를 사랑한다는 지식인이나 사회 운동가들 중에, 가족에게 무관심하고 어른에게 무례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이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지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가까운 데서부터 먼저 실천되어야합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합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길이 기도 응답입니다. 기도 응답을 통해서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아,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있으시구나. 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구나.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의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응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믿는 분들이 다소 이기적인 내용을 갖고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에 관하여 비판적인 분들은 또 저절로 일이 해결된 것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기도 응답해주셨다고 억지를 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되었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입니다. 그 필연 뒤에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어떤 분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오히려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