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둘이서 교회 마당에서 놀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넘어뜨려서 얼굴이 깨어져 피가 났습니다. 넘어뜨린 아이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이 사라지고 다친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유학생이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와 보니까 최근에 새로 산 차를 누가 긁어 놓고 갔습니다. 접촉 사고를 낸 사람이 혹시 전화번호라고 남겼나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훼손이 간 것을 몰라서 그랬을까 싶어서 나눔터에 글을 올려 연락을 부탁했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사고를 내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입니다. 운전면허를 따고 얼마 안 되어 학교에 차를 몰고 갔는데 주차 공간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차장을 몇 번 뱅뱅 돌다가 간신히 자리를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운전이 서투른데다가 다른 차가 차지하기 전에 얼른 주차를 해야겠다고 서두르다가, 옆에 주차한 차 뒤 범퍼 옆쪽을 살짝 박았습니다. 크지는 않았지만 범퍼에 손상이 간 것은 분명히 보였습니다. 유학생이라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때라 주인이 큰 손해배상을 청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도망쳐 다른 빈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였습니다.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도 사라지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백성들은 정의로운 재판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을에 사또가 부임해도 대부분은 법을 이용하여서 백성들을 착취했지, 법대로 의롭게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죄를 지으면 들키지 않거나, 들키면 잡아떼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민족성으로 정착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미국에 처음 와서 경찰차를 보면 죄지은 것이 없어도 가슴이 덜컹했던 것도 법을 두려워하는 몸에 밴 속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크리스천은 잘못했으면 실수를 인정할 줄 알아야합니다. 남에게 손해나 상처를 입혔으면 보상할 줄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눅 3:8)” 교회나 타인의 물건을 훼손시켰으면 변상하고, 주차장에서 접촉 사고를 내면 쪽지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올바르게 살기로 마음먹으면 변상해 주어도 경제적으로 손해 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