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선주가 아기를 낳아서 제가 정식으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던 딸 아이 집을 거의 매주일 찾게 되는 것을 보니, 손녀딸이 예쁘기는 예쁜 모양입니다. 손자손녀를 낳으면 아들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예쁘다는 얘기를 주위에서 하도 많이 해서 사실 긴장이 되었습니다. 손녀딸이 예쁘게 느껴지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llie는 3주 반 정도 일찍 태어나서 몸집도 작고 팔다리도 가늘었지만 이제는 몸무게도 늘고 사지도 굵어졌습니다. 아직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선도 못 맞추지만, 배냇짓이라도 하면 진짜 웃는 것처럼 얼마가 귀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 .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 한편 서글프기도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에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이런 것을 관람하는 재미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위기를 넘기고,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역이나 엑스트라로 나오는 나이 든 할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고집스럽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거추장스러운 노인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에는 서글픔을 느낍니다. 남들은 주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직도 사랑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위인전을 읽으면 가슴이 뛰는데 말입니다.
천국의 희망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이 세상이 다이고 천국이 없다면 저는 깊은 허무감과 우울증에 빠졌을 것입니다. 언제인가 쇠락하지 않는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늙는 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재물이 있는 부모들이 자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후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주연의 자리를 내어주고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은퇴 후에 조용히 사라지겠다는 결심을 곱씹게 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은퇴 후에도 전과 똑같은 영향력을 발휘하려 하기 때문에 후임자와 갈등이 생깁니다. 저는 담임 목사로 세워주신 동안에 열심히 일하고, 은퇴 후에는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면 휴스턴을 뜰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후임이 제 후광에서 벗어나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젊어지려 말고, 젊음을 그리워도 말고, 자신의 나이를 조용히 수용하는 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곱게 늙는 법을 배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