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주일 새벽에도 주중과 같은 시간에 교회에 나와 그 날 예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교회에 올 때 운전하면서는 설교 리허설을 합니다.
리허설에 집중하다 보면 운전은 생각 없이 거의 자동적으로 합니다. 지난겨울 어느 새벽, 빨간 신호등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구인가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인적이 없는 깜깜한 새벽길에서 리허설에 집중하고 있던 참에 얼마나 깜짝 놀랬는지 모릅니다. 보니까 남미 계통 사람이 자동차 창문을 열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창문을 조금 내리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무어라 하는데 영어가 짧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Long Point', 'gas', 'pay'라는 단어를 종합해 보아 가솔린 값을 줄 테니 Long Point 어느 지점까지 데려다 달라는 것 같았습니다. Long Point라면 사실 못 데려다 줄만한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차도 없고 인적도 없는 깜깜한 새벽입니다. 차를 태워주었다가 강도를 당했다는 신문 보도가 머리를 스쳤습니다. 순간적으로 갈등을 하다가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것을 보고 거절의 의미로 머리를 흔들고 차를 움직여 그 자리를 떴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길에 피 흘리고 넘어져있을 때에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저 같은 종교 지도자였다는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다시 생긴다 할 때에 다르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잘 알려진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장발장은 오랜 감옥 생활 후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잠잘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한 신부가 잠자리를 제공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장발장은 밤에 일어나서 저녁 식탁에 놓였던 은촛대를 훔쳐 품에 안고 도망칩니다. 그러다가 수상쩍게 여긴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품에서 은촛대도 발각되었습니다. 경찰이 장발장을 신부에게 데려와 대질시켰을 때에 신부는 그 촛대가 장발장이 훔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선물로 준 것이고 말해서 그가 놓여나도록 합니다. 이 사랑에 감격하여서 장발장은 다음부터 선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어릴 적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이 신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이 이 신부 같은 삶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훨씬 더 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 10:16) 비틀기처럼 순진하면서도 뱀처럼 슬기로워지는가가 저에게는 큰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