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번 세겹줄 기도회 때 ‘헤븐’을 상고하면서 세상 떠나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천국에 가서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 할머니는 사랑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학생들이 군화를 신고 다녔는데, 겨울이면 발 시리지 않도록 아랫목에 묻어두었다가 신겨주곤 하셨습니다. 국을 뜰 때에는 국그릇에 한 번 담았다가 냄비에 붓고는 다시 담아주셨는데, 국그릇에서 냉기를 없애 따뜻한 국을 먹이려는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철들어 깨달았습니다.
연말이 되면 제게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우리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연탄 배달을 시키셨고, 고기나 계란을 사서 보자기에 싸서 갖다 주도록 하셨습니다. 남학생들이 물건담은 보자기를 들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저는 이 심부름이 썩 싫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 조부님은 한국 전쟁 시 성결 교단에서 배출한 6명의 순교자 중의 한 분으로서, 한국 순교자 회관에 봉치되어 계십니다. 청렴하고 강직했던 탓에 가계는 항상 쪼들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지방 목회자 자녀들이 서울로 유학 오면 이들을 데리고 계시면서 이들이 보태는 생활비로 가계를 챙기셨습니다.
조부님이 납북된 후에 할머니는 건강을 핑계대고 교회 출석을 않으셨습니다. 후임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불편을 심어줄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집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주로 하소연 할 곳 없는 목회자 사모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옛날에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던 이성봉 목사님 사모님도 찾아오셔서 두 분이 목침을 베고 마주 누워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찾아오신 분들이 주로 말하고 제 할머니는 거의 듣기만 하셨습니다.
장손이라 그런지 할머니는 저를 제일 가깝게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오하이오에서 결혼하여 유학생활을 할 때, 같이 살며 가사를 돌보아주셨고,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 산호제로 이주했을 때에는 같은 지역으로 이사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92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92세 노인의 장례식인데 수많은 분들이 원근각처에서 모여들었습니다. 할머니 생전에 직접 간접으로 은혜를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할머니에 관한 일화를 나누면서 같이 울고 웃고 했습니다. 장례식이 마치 무슨 잔치 같다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보고 싶은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천국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