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3-4대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자녀 교육을 따로 시키기 않아도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핵가족 시대가 열리면서 자녀들을 의도적으로 교육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의 자녀 교육은 강압적이었습니다. “어른이 하라고 하면 하는거야!” “너, 엄마 말 안 들을래?” 그러나 지금 이런 방법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도 통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자녀 교육 원칙이 있다면,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들의 인생을 망쳐주는 것입니다. 장성해서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절망에 빠지거나 반사회적인 인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여서 술 마신다는 소문이 난 파티에 청소년 자녀가 가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해야합니다. 불평을 쏟아놓겠지만 내심으로는 고마워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울타리가 없는 것은 불안하기 문입니다.
청소년기는 자아를 발견해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부모의 가치관에 도전을 하게 됩니다. 많은 부모에게는 이것이 반항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권위로 억누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녀들과 충돌이 계속되면, 그만 지쳐버려서 “에라 모르겠다” 방치해 버립니다. 그러나 방치하는 것은 권위로 누르려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려면 울타리를 쳐주고, 그 안에서 선택하는 법을 가르쳐야합니다. 예를 들어 어디 나갈 때, 어린 자녀에게 “너, 뭐 입을래?” 하면, 추운 날 얇은 옷을 선택하든지, 공식적인 자리에 가는데 어울리지 않는 옷을 골라 부모와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선택을 완전히 맡기지 말고 옷 두 개를 골라주면서 “너, 빨간 옷 입을래, 파란 옷 입을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울타리 안에서 선택입니다.
목회가 자녀 키우는 것과 유사해서 그런지, 목회에도 울타리 안에서의 선택이라는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원칙이라는 큰 울타리를 쳐주고 성도들이 그 안에서는 재량껏 사역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창의력을 발휘해서 사역을 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계명이라는 울타리를 쳐주시고, 그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울타리 안에서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원리이고, 우리가 이 원리를 좇아 자녀들을 양육하면 이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