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실린 글을 '목회와 신학'에 기고하려고 쓴 글입니다.
몇 분에게 미리 보여드렸더니, 이런 글이 게재되면 제가 신학자들 공격의 타깃이 될 것 같다는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비평을 잠재우자는 의도로 쓴 글이 논쟁에 불을 부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면 가정 교회 전파에 지장을 줄 것 같아서, 기고를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
그러나 써 놓은 것이 아까워서 ^^; 여기에 실립니다. (좀 기니까 긴 글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안 읽어도 됩니다. ^^;)
“가정 교회 비평에 대한 소고”
가정 교회에 관한 토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교단 별로 포럼이 열리기도 하고, 기독 서적이나 잡지에도 가정 교회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목회와 신학’에서는 2007년도 11월호에서 약 60페이지를 할애하여 가정 교회에 관한 특집을 실렸다.
교단 차원에서 토론의 장을 처음 연 것이 고신이었다. 목회자들의 연구모임인 미래교회 포럼을 통해서 교단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초청해서 가정교회에 대해서 발제를 하고 토론을 가졌으며, 신학대학원에서 가정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공개적으로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교단의 신문인 기독교보에서는 가정 교회에 관한 글을 여러 차례 게재했다.
합신에서도 특별 강연, 교단 신문을 통하여 가정 교회에 관한 토의를 벌이고 있다가, 최근에는 합동 신학 신학원에서 발간하는 신학지인 ‘신학 정론’에서 이례적으로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가정 교회’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가정 교회가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토론은 빈도나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가정교회를 비평하는 원칙에 관한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가정 교회에 관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이 장로교단이기 때문에 장로교단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그러나 제시된 원칙은 모든 교단 신학자에게 다 적용될 것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가정 교회에 관하여 긍정적이고 호의적이고, 신학자들은 비판적이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특히 장로교 신학자들 간에는 가정 교회가 장로교 전통에 안 맞는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정 교회에 관한 토론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이 장로교단 중에서도 보수 교단으로 알려진 고신이나 합신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두 교단의 핵심가치가 성경에 충실하자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 교단 목회자들이 가정 교회를 남보다 앞서 도입하게 되었고, 이것이 교단 신학자들의 비평을 유발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신앙의 기본으로 삼는 교단이라면 비평 방법도 이에 부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보수 교단에서 신 신학을 거부하는 이유는 신 신학자들은 성경보다 신학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초하여 신학을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신학적인 이론을 갖고 성경을 비판하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교회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제시된 신약 교회에 의하여 교회론이 점검되어야지, 신학에 기초한 교회론에 기초하여 신약 교회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교회론은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관한 주님의 기르침과, 사도행전 여기저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교회 모습과, 사도들의 편지에 암시되어 있는 교회 생활에 기초하여 정립된 것이다. 교회론은 여러 데이터를 집합하여 추론을 거쳐 형성된 것인 만치 여러 종류의 교회론이 주장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교회론을 신봉하든지 신약 성경에 기록된 교회에 관하여 다음 세 가지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1) 신약 교회에 중요했던 것은 조직보다 정신이었다. (2) 신약교회는 유동적이었다. (3) 신약교회는 다양한 양태를 가졌다.
신약 교회가 조직보다 정신에 기초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신약 교회는 마스터플랜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의거하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대 사명을 수행하는 가운데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상황에 맞게 세워졌다는 것이다.
신약 교회가 유동적이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신약 교회는 현대 교회처럼 철저하게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택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가 형성되는 초기 과정에 불가피하게 생기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유동성 때문에 신약 성경에서는, 예를 들어서, 장로나 집사가 직분인지 은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다. 장로는 교회의 어른, 집사는 교회 일을 돌보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보통 명사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충분히 근거가 있다. 사도나 예언자도 직분보다는 은사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약 교회는 또한 양태가 다양했다. 유대인이 주류를 이루는 교회와 이방인이 주류를 이루는 교회가 달랐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고, 로마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다른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의 교회만이 신약 교회라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이 틀렸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신약 교회는 유동성과 다양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 형태가 모든 신약교회를 대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정 교회는 신약 교회의 유동성과 다양성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 교회는 여러 다른 교단의 교회 형태가 다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장로교회의 장로제도도, 감리 교회의 감독제도도, 침례교회의 회중 제도도 그러한 주장을 할 만한 충분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가정 교회는 신약 교회 회복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후세에 정립된 교회론이 아니라 신약 성경 자체에 의하여 평가되어야한다. 16세기에 정립된 교회론을 잣대로 가정 교회를 평가하는 것은 학구적인 면에서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그 잣대에 의하여 가정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결론은 내린다면, 잘못된 것이다. 정립된 교회론의 잣대로 잰다면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교회가 ‘교회’라고 인정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
가정 교회는 신약 교회의 유동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조직이나 제도보다 신약 교회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7개 조로 되어있는 가정 교회 사명 선언문에서 명시하고 있다. 참고로 2002년에 작성된 사명 선언서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1. 신약 교회의 회복을 추구한다. 조직, 활동(행 2:42), 사역 방법(행 2:46-47), 리더십 스타일(마태 20:26-27)을 가능하면 신약 성경에 가깝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한다.
2. 교회 성장보다 영혼 구원에 우선순위를 둔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딤전 2:4).
3.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에 교회 존재의 목적을 둔다. 이것이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마 28:19-20).
4. 지식 전달보다는 능력 배양에, 교실 교육보다는 현장 실습에, 말로 가르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제자 훈련의 방법으로 사용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막 3:14-15).
5. 목회자와 평신도 각자가 본연의 사역을 되찾도록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과(엡 4:11~12상), 기도와 말씀 선포(행 6:2-4), 리더십 발휘에 집중한다(행 20:28). 성도들은 목양과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한다(엡 4:12하).
6. 셀 그룹이나 소그룹이 아니고 신약적 원형 교회를 추구한다. 가정 교회의 기초 공동체인 목장이 신약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다음 사항을 고수한다.
(1) 매주일 모인다(행 20:7).
(2) 남녀가 같이 모인다(롬 16:3-5).
(3) 신자와 불신자가 같이 모인다(고전 14:23-25).
7. 직제, 성례, 설교권 등 제반 사항에 관하여서는 각개 목회자의 신학적 배경과 소속된 교단의 전통을 존중해준다.
가정교회의 기초가 되는 4가지 정신을 ‘가정 교회 4개의 기둥’이라고 부른다.
첫째 기둥은 교회의 존재 목적을 주님이 주신 대사명에 기초하여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데에 두는 것이다(2항과 3항). 둘째 기둥은 제자 만드는 주 된 방법을 말로 가르치기보다 삶을 보여주는 것에 두는 것이다(4항). 셋째 기둥은 말씀 사역자와 ‘평신도’의 사역을 성경적으로 분담하는 것이다(5항). 넷째 기둥은, 사명 선언서에서는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섬기는 리더가 되는 것이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가정 교회를 우리는 ‘단순함과 엉성함’으로 표현한다. 신약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유동성과 다양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쉬운 말로 표현한 용어이다.
신약 교회는 성령님에 의하여 형성되어가고 있는 미완성 교회였기 때문에 가정 교회 사명 선언서 6항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정 교회를 ‘신약적 원형 교회’로 표현하고 있다.
가정 교회는 줄기 세포와 같다고 생각한다. 줄기세포가 환경에 따라 심장도 되고, 신장도 되고, 근육도 되듯이, 건강한 가정 교회는 발전하여 건강한 장로교회, 건강한 감리 교회, 건강한 성결교회, 건강한 순복음교회, 건강한 침례교회를 이룬다고 믿는다.
서론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가정교회에 관한 비평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분명히 할 것은, 교단 신학자들이 가정 교회를 비평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필자도 신학자나 교수가 가정 교회에 쓴 글을 입수하면 줄을 쳐가며 꼼꼼히 읽는다. 그러면서 배우는 것도 있고, 애매했던 것이 명확해지는 경험도 하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을 때도 있다.
가정 교회에 관한 토의와 비평은 계속되어야겠지만, 그러나 접근 방법에 있어서는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가정 교회에 관하여 가장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교회’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굉장히 허술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면 교회라고 불렀고(마태 16:16-18), 심지어 단순한 모임에까지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행 19:32, 39, 41). 가정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회’라는 의미는 이런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라는 정의를 갖고 신학적인 논쟁을 벌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복음적인 교단에서 내린 정의라면 모든 정의를 수용할 용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정 교회’의 정의는 이렇다: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집에서, 6-12명이, 매주 한번 이상 씩 모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예배, 교육, 교제, 전도와 선교 )을 다하는 공동체” (이 정의는 신학자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2007년에 개정된 것으로, 1999년에 출간된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두란노)’에 수록된 것과 약간 다르다.)
2007년부터 다음과 같은 정의도 수용하기로 하였다. “신약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기 위하여,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집에서, 6-12명이, 매주 한 번 이상 모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예배와 교육, 교제와 봉사, 전도와 선교)을 다하는, 기초 공동체인 목장으로 이루어진 지역교회”
두 번째 정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한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지역교회만을 ‘교회(ekklesia)'로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정의에 입각해서도 신약 교회 정신이 충분히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첫 번 정의를 우리가 추구하는 가정 교회의 ‘정식’ 정의로 삼는 것은 신약 교회를 회복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교회’라는 단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신약 교회를 회복한다는 사명감이 목회자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고, ‘평신도 목회자’라는 자부심이 평신도들에게 영혼 구원의 열정을 불붙여주기 때문이다.
장로교 신학자들이 ‘교회’라는 정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집에서 모이는 작은 모임을 ‘교회’라고 했을 때에 장로교회의 특징인 당회나 노회가 무력화되지 않을까 는 기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가정 교회’라고하면 교단이나 직분, 교회 건물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과격한 공동체를 의미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필자가 현재 영어로 집필하고 있는 가정 교회에 관한 저서에서도 이들과 차별화를 꾀하기 위하여 우리 식의 ‘가정 교회’ 영어 표기를 'house church' 대신에 ‘Ga-jung church'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가정 교회는 그런 극단적인 가정 교회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신약 교회의 형태가 아니라 신약 교회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전통 안에서 얼마든지 꽃 필 수 있다. 가정 교회를 도입한 많은 장로교회들이 장로교회 전통 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 증거이다.
가정 교회가 침례교 시스템이라고 오해하는 장로교 신학자들도 있다. 가정 교회를 시작한 휴스턴 서울 교회가 침례교단에 속했으니까 그런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정 교회는 침례교회 시스템이 아니다. 신약적인 시스템이다. 한국에서 목회자나 평신도를 위한 가정 교회 세미나를 주최하는 교회가 2006년도까지만 해도 100% 장로교회였고 (약 10개) 침례교회는 하나도 없었다. (2007년에 순복음 교회가 하나 더해졌고, 2008년에 성결교회와 침례교회가 하나 씩 더해진다.)
가정 교회는 회중주의에 기초했기 때문에 대의주의를 믿는 장로교회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가정 교회 실체를 들여다보면 회중주의이다, 대의주의이다, 한 마디로 말하기가 어렵다. 가정 교회는 신약 교회 구조보다 정신을 추구하기 때문에 속한 교단에 따라 교회 운영 조직이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침례 교단에 속한 휴스턴 서울 교회 시스템은 장로교회에 가깝다. 목양은 목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교회 치리나 행정은 장로교회 당회에 해당하는 안수 집사회의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가정 교회가 장로교회에 가장 잘 맞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한 때 미국 United Presbyterian Church 노회에 속한 한인 장로교회 장로로서 당회를 섬긴 적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에 의하면 장로는 치리와 목양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목양은 목회자에게 맡기고 장로는 치리에만 집중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가정 교회를 통하여 목양을 하는 사람이 장로로 세워진다면, 치리와 목양을 겸비한 이상적인 장로가 세워질 것이다.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기독교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전에는 절에 다니다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즈음은 교회 다니다가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또 교회를 통하여 극적으로 삶이 변화되었다는 간증도 점점 듣기 어렵게 되었다. 기독교가 유럽처럼 생활 종교가 되고 있다. 또 사회에서 교회를 보는 시선이 따갑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라든지, 교회와 관련된 사건이 보도되면 줄을 잇는 악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전통 교회가 위기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인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교회 모델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모델은 이론은 있는데, 그 이론에 기초해서 세워진 샘플 교회가 없다. 어떤 모델은 이론도 있고, 샘플 교회도 있는데, 다른 교회가 보고 배우기가 힘들다. 어떤 모델은 이론도 있고, 샘플 교회도 있고, 다른 교회가 보고 배우기도 하는데, 재생산이 안 된다.
교회 갱신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3대가 형성 되어야한다. 그래야 그 운동을 시작한 개인이나 교회가 사라져도 그 운동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가정 교회는 1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미 3대가 형성 되었다. 휴스턴 서울 교회가 1대라고 한다면, 서울 교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를 통하여 가정 교회를 정착시킨 교회가 2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2대 교회 가운데에서 휴스턴 서울 교회나 필자의 도움 없이 목회자를 위한 가정 교회 세미나를 개최하여 다른 교회를 돕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이 교회에서 배워 가정 교회를 정착시킨 교회가 바로 3대 교회이다.
이처럼 가정 교회가 짧은 기간 안에 3대, 아니 4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가정 교회가 신약교회의 형태나 직제에 중점을 두기보다 정신을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의 전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정 교회 접목이 가능했고, 교단을 초월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가정교회에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가정 교회 기저에 흐르고 있는 ‘섬기는 리더십’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님께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종이란 주인의 필요가 자신의 필요보다 우선하는 사람이다. 필자는 종이란 남을 성공시켜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정 교회에는 이러한 종의 정신이 배어있다. 목회자는 자신이 스타가 되려하기보다 평신도인 목자를 성공시켜 주려한다. 선발 주자 가정 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보다 후발 주자 목회자들을 성공시켜 주려한다.
이러한 두 가지가 가정 교회 확산을 돕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목회는 신학에 기초해야하지만, 또한 신학은 목회를 염두에 두고 세워져야한다. 그러므로 가정 교회를 비판할 때에 신학자는 가정 교회의 열매도 살펴야 할 것이다.
가정 교회에서는 불신자 전도의 열매가 많다. 미국 같은 데에서는 수천 명이 모이는 한인 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이 주위 교회에서 몰려든 사람들이고, 그 교회를 통하여 회심한 사람은 몇 안 된다. 한국에서도 소수의 교회를 제하고는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 교회에서는 사이즈에 상관없이 주일 출석 인원의 10% 이상 되는 불신자들이 매년 예수를 믿는다.
필자가 거주하는 휴스턴은 인구로 보아서는 미국에서 넷째 가는 큰 도시이지만, 한인 인구는 이상하게 많지 않다. 2000년도 연방 통계에서 휴스턴 한인 인구가 약 8,000명으로 집계되었다. (한인 자신들의 짐작으로는 15,000-20,000명을 잡는다.) 이러한 곳에서 휴스턴 서울 교회를 통하여 매 년 150-200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는다. 매주일 평균 3-4명이 구원을 얻는 셈이다. 불신자 전도에 집중하기 위하여 기신자 등록을 받지 않고, 구원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주재원, 학생, 일시 방문자 등 일정 기간 휴스턴에 거주하다가 이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재 1,000명을 약간 웃도는 장년 주일 출석 인원 증가는 현저하지 않지만, 교인 숫자가 급속이 증가하지 않는데 대한 부담은 없다. 하늘나라라는 관점에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 인구의 17%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에 적을 둔 사람이 다 천국에 간다고 해도, 예수님이 오늘 저녁에 오시면, 100만 인구를 가진 도시에서는 17만 명만이 천국에 가고 83만이 지옥에 간다. 그러나 교회도, 지도자도, 지옥 가는 83만에 별로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관심이 17만에 집중되어 있다. 이미 천국에 가게 되어 있는 17만 명 데리고 성경공부하고, 제자훈련하고, QT 훈련시키고, 찬양 예배드리고, 기도회 갖고... 그러다가 이 17만에 속한 사람이 자기 교회에 와서 교인 숫자가 늘면 부흥한다고 좋아하고.. 자기 교회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옮기면 억울해 하고...
가정 교회는 이러한 정신을 배격한다. 지옥에 갈 83만에 속한 사람을 천국 가는 17만에 속하게 만들고, 자신의 교회에 머물러 있으면 좋고, 다른 교회로 옮겨도 좋다 는 하늘나라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그래서 교인 숫자가 몇 명이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교회를 통하여 몇 명이 구원 받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정 교회의 독특한 호칭, 예를 들면 목자 목녀라는 호칭을 거북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목자란 가정 교회를 책임지는 평신도 지도자를 의미하고, 목녀란 목자의 아내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직분 외의 직분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직분이 아니다. 사역을 지칭한다. 목자나 목녀가 목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호칭이다. 직분이 아니고 사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목자로 섬기다가 목자 사역을 그만두게 되면 목자 목녀라는 호칭도 당연히 사라지게 된다.
자신이 좋은 것을 경험하면 남에게 소개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신약 교회에 근접하고, 불신자 전도에 효과적인 가정 교회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를 전파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다보니 가정 교회가 일종의 교회 갱신 운동이 되어버렸다.
어떤 운동이 힘을 모으기 위하여서는 소속된 사람들이 공통 가치를 소유해야한다. (앞서 말한 가정 교회 사명 선언문이라든가 가정 교회의 4개의 기둥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또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어야 다른 것들과 차별화가 되어 지고, 힘이 모아진다.
이러한 문화 중에 하나가 ‘가정 교회’ '목장‘ ’목자‘ 목녀’ 등의 호칭이다. 이런 호칭을 첫 번 듣는 사람들에게 거북함을 심어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호칭을 고집하는 것은 이것이 힘을 모으는 데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정교회 목회자들이 교단의 직분을 무시하거나 교단에 대항하는 조직체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가정교회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교단을 사랑하고 교단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만일 가정 교회와 교단,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사태가 생긴다면 거의 다가 서슴없이 교단을 선택할 것이다. (필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정교회가 교단을 세워야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단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단 부흥을 위하여 가정 교회에 더 열정을 쏟아 붓는 것이다.
쇠퇴해가는 한국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현재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어 뵈는 것이 가정 교회이다.
신학자들은 가정 교회에 관하여 계속 비평과 토의를 아끼지 말아주기 바란다. 이럴 때에 가정 교회는 오류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게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회의 정확한 실체를 모르면서 지나치게 혹독한 비평을 하여 신약적인 교회를 갈망하는 목회자들의 꿈을 꺾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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