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난중일기’를 읽었습니다.
'이순신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노승석이라는 분의 번역본인데, ‘번역’이라고 하니까 의아해할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장군은 일기를 한글이 아니라 한자로 기록했기 때문에 번역이 필요합니다. 초서체에다가, 갈겨썼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해독이 필요합니다. 번역자는 존재해 있는 모든 사본을 검토하고, 잘못된 부분은 수정 보완하여 완성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번역본을 출판하였습니다.
‘난중일기’는 '새마을 운동' 관련 기록물과 더불어, 인류 역사에 가치 있는 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의하여 최근에 지정되었기 때문에 읽어볼만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이 장군의 군인으로서의 삶이 목회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이순신 장군에게 매료되어 있는 분들을 위하여, 이 장군의 일상 가운데 제게 흥미로웠던 점들을 소개합니다. (괄호에 있는 것은 ‘난중일기’ 인용 구절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23전 23승을 거두어 영국의 넬슨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제독입니다. 그런데 23전 23승을 한 장군이라면 항상 바다만 노려보며, 전투만 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해에는 1년 동안 전투를 한 번도 안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행정으로 보냈습니다. ( “군사 열일곱 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 더 주었다.”, “가을보리 소출이 마흔세 섬이고 봄보리는 서른다섯 섬이며,”) 목회와 상관없는 행정에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목회자와 비슷했습니다.
이 장군은 공정하지만 엄격했습니다. (“곤장을 쳤다”, “발바닥을 호되게 매질하였다” “목을 베었다”) 어머니에게는 효성이 지극했고(“어머니께서 평안하시나, 식사하시는 것이 전보다 줄었다고 하니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집안 종들에게는 자상했습니다(“종 경이 심하게 앓는다니 무척 걱정이 된다.”).
안타깝게도 이 장군은 심하다 싶은 정도로 미신을 신봉했습니다. (“기쁨을 얻었다는 점괘를 얻었다”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는데 이것을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무인이면서도 의외로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식은땀을 흘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두 번씩이나 구토했다.”) 건강이 안 좋았던 것은 술은 과다하게 마신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종일 여러 장수들과 술에 취했다.” “어제의 취기로 인해 몸이 몹시 불편했다.”)
옛날 사람들은 건강관리는 어떻게 했나? 이 장군의 건강 관리법은 활쏘기였습니다. 활을 같이 쏘는 것이 손님 접대의 일부였고, 내기 활쏘기 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주일(일요일)의 개념이 없었을 텐데, 언제 쉬었나 는 의문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나라 제삿날과 집안 제삿날이 공휴일이었습니다. 왕의 친가, 외가 3-4대에 걸쳐 제사를 지냈고, 제삿날에는 공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삿날을 다 합쳐보면 현재 공휴일 숫자만큼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순신 장군에게 ‘몸의 가시’ 노릇을 했던 사람이 원균입니다. (“흉포하고 패악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말을 지어내어 훼방하는 데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원균은 이 장군보다 나이가 더 많은 군대 선배인데, 신실함이 결여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장군을 거역하는 일이 잦았고, 중상모략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고도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았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원균의 모함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억울하게 파직이 되었지만 백의종군 하다가,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왜군과의 해전에서 대패하자 다시 복직되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난중일기’을 읽고 난 후에 생기는 첫 감정은 경탄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바르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거룩할 성(聖)’자를 붙여 ‘성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분이기는 했지만, 인간 예수에게 비교하면 태양 앞에 촛불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 뿐만이 아니라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모든 위인들의 삶을 보면 위대한 면이 있었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두운 면도 많습니다.
정기적으로 미국 대통령 순위를 매기는 역사학자들의 평가회에서, 항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선정되고 있는 링컨도, 흑인 해방을 선포한 것이 인도적인 차원에서라기보다 남부군에게 밀리는 전황을 호전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고, 이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하여 국회의원들을 매수하고 협박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인물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내릴지 모릅니다. “위대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별 것 아니었구나.”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결론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별 것 아닌 사람이 위대한 삶을 살았구나.”
특별히 크리스천에게는 이런 관점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 약한 사람들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해 진다(고후 12:9).” 이러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평범하고 결점 많은 우리들도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