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를 하다 보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지도자 모세에게도 비슷한 욕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출 33:18). 건방진 요구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시고,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뒷모습만 보여주셨습니다 (출 33:18-23).
왜 뒷모습만 보여 주셨을까?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시기 때문에 작디작은 인간이 그 모습을 정면으로 보았다가 영광에 압도되어 죽을까 봐 그러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모두 압도 되어서 죽다시피 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외친 것이 “나 죽었다!”입니다(사 6:5).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도 계시 가운데 주님의 모습을 보고는 죽은 사람처럼 땅에 꼬꾸라졌습니다(계 1:17).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와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광대한 우주를 말씀으로 지으시고 자연법칙을 만드셔서 우주를 지탱하시는 큰 분이면서(골 1:15-17),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주관하시는 세심 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거대한 능력을 가진 분이면서, 그의 백성들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 감성적인 분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크신 분이시면서, 70억의 인구 중의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 오는 작은 일에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눅 15:10). 성도들의 앉고 일어 서는 것을 살피시고, 마음속으로 기도한 것도 응답하시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항상 그의 자녀들과 더불어 같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인격체를 머리에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실 때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 2 계명을 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아무리 아름답고 위엄스럽게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한다 해도 그의 온전한 모습을 보이기에는 절대적으로 미흡합니다.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을 방문하여 미켈란젤로의 명작 ‘아담의 창조’에 그려진 하나님을 보았을 때, 예술성에는 감탄을 했지만, 느껴진 감정은 “ 저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라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이나 조각 뿐 아니라 언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학적 논리와 언어의 한계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요 14:9)?”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에서 몰아치는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제어할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고, 5개의 빵으로 5,000명을 먹이심으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분이기 때문에 자연 법칙을 뛰어 넘는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셔서 하나님은 치유하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셔서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변호하고 옹호하심으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품으시는 분임을 보여주셨고, 가난한 사람, 낮은 사람,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셔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이라는 관문을 지나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시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도 점점 더 알아가야 할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경외하게 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체험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좇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아버지를 나타내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장). 순종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언어로는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