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다카이브’는 ‘한곳에 더불어 많이 있게 하다’라는 의미의 순수 우리말 ‘모다’와 ‘기록 보관소’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아카이브(archive)’를 조합한 것입니다.

여기에 올리면 좋을 최 목사님과 관련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 : 남인철 목사 / kpcovisi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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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기 목사 부모님 이야기

최영기 목사 부모님 이야기
저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6.25 전쟁 때 양친을 다 잃었기 때문입니다.
주위 어르신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제 부모님은 월북하신 것 같습니다. 6.25 사변을 일으키고 승승장구
하며 남쪽으로 진격하던 북한군이, UN군이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이북으로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들과 함께 북으로 간 것 같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는 만 5살이었기 때문에 당시 정황을 잘 기억 못합니다. 부모님에 관한
단편적인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첫째 기억은, 아버지가 포승을 지우고, 용수를 쓰고, 교도소 트럭에 실려가는 장면입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는,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도하던 사회주의자 여운형 씨의 측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1947년에 여운형 씨가 암살된 후 여운형 씨 지지자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체포되고,
투옥되었을 때, 그 사람들 중의 하나로 투옥되었고, 재판소에서 감옥으로 이송되던 모습을 제가 보았던 것
같습니다.
둘째 기억은, 아버지가 초췌한 몰골로, 남루한 옷을 입고, 대문 앞에서 서 있던 장면입니다. 6. 25전쟁이
발발하여 공산군이 삽시간에 밀고 내려와서 서울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투옥되어 있던 정치범을
풀어주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도 감옥에서 풀려나와 집을 찾아왔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째 기억은, 조부님과 아버지 둘이서 겸상으로 저녁을 드시던 장면입니다. 둘이서 한 마디도 안 나누며
묵묵히 진지만 드셨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밥 먹을 때 말을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주위를 서성이며
안절부절 하시던 할머니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념이 다른 부자가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대화를
단절하고 지내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교회 장로님들은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북한군에게 납북되어간
아버지를 찾기 위해 북으로 갔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의이건 타의이건 이들에게 협조했습니다. (어머니도 이화 여대의 전신인 이화전문여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서울이 탈환될 때 남한 정부로부터 받을 보복이 두려워서 북으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식을 두고 북으로 간 부모가 원망스러운가? 자식보다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다는 서운함이 살짝 스칠
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당시에 민족과 백성을 사랑하는 젊은이라면, 평등을
주장하고, 계급 없는 국가를 약속하는 마르크스 이론에 심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북한 정권에 협조했을 것이고, 국군이 밀고 올라올 때에는 북한군과 더불어
이북으로 같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없이 자란 것이 꽤 큰 후유증을 남겼다는 것을 나이가 들며 더 느낍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셨더라면, 두 분이 다 고학력의 사회적 엘리트였기 때문에 저는 무척 건방진
사람이 되었을 지 모릅니다. 부모님 없이 자랐기 때문에 사회적인 약자들을 이해하고, 이들의 편이 되려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큰 유익은, 부모님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더 감격하고, 더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결혼사진 (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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