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다카이브’는 ‘한곳에 더불어 많이 있게 하다’라는 의미의 순수 우리말 ‘모다’와 ‘기록 보관소’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아카이브(archive)’를 조합한 것입니다.

여기에 올리면 좋을 최 목사님과 관련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 : 남인철 목사 / kpcovisi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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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기 목사 가족 이야기

최영기 목사 가족 이야기
저는 1944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미동 국민학교, 경기 중학교, 경기 고등학교, 서울 대학교(공대
전자과)를 졸업했고, 해군에서 3년 3개월 복무하고 중위로 제대하였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전자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북가주에 있는 Varian이라는 회사 중앙연구실에서 9년간 일을 했습니다.
1984년에 직장 생활을 그만 두고, 미국 남침례회 5대 신학교 중의 하나인 Golden Gate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현재 명칭은 Gateway Seminary)에 입학하여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87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아내 조혜순과는 1966년 제가 대학교 4학년, 아내가 2학년 때 만났습니다. 아내는 당시 이화대학 약대 재학
중이었습니다. 유학 오기 직전 1970년에 약혼식을 올렸고, 아내는 다음 해 같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
입학 허가를 얻어 도미하였습니다. 그 직후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내는 이화 약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약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박사 학위까지 취득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연구생활보다는
평범한 약사로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면서, 다른 대학에서 1년을 더 공부하고 미국 약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리고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텍사스에서 풀타임 약사로 일했습니다.
슬하에는 아들과 딸을 두었습니다.
아들 선일(Daniel)은1976년에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페이스북이 시작되던 초기에 입사하여, 페이스북 유럽 지사를 설립하는데도 기여했습니다. 지금은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같은 Stanford 대학교에 재학중이었고, 같은 교회에서 찬양 팀원으로
사역하던 박지은과 결혼하여,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딸 선주(Christine)은 1977년에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텍사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휴스턴서울교회 목자의 아들이고, 소아과 의사인 Peter Jung과 결혼하여 슬하에 1녀 2남을 두고 있습니다.
사위와 딸은 휴스턴서울교회 영어 회중(New Life Fellowship) 목자 목녀로 섬기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1996년에 난소암 4기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2~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를 말했지만,
가정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로, 24년을 더 살고 202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래는 2023년 6월29일에 아내 3주기를 맞아 아내를 기리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아내가 2020년 6월2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오늘이 3주기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질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보고 싶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내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내에 대한 감정은 주로 그리움이지만, 자주 미안한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곤 합니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많은 희생을 바쳤는데, 몰라주고, 고마워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입니다.
저는 해군에서 제대한 후 아내와 같이 유학 준비를 했습니다(결혼 전). 그런데 제가 입학 원서를 제출했던
세 대학원에서 모두 딱지를 맞았습니다. 유학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결혼한 사이도 아니니까 아내는, “내가 먼저 미국에 갈 테니까, 나중에 와요” 라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 한국에서도 잘 살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유학의 꿈을 접었습니다.
아내에게 유학은, 가난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를 포기한 것인데, 저는 사랑하는
사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저는 추가로 원서 제출을 했고, 얼마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아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 아내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아 미국으로 왔고,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마치고 연구실에서 일하던 중, 하나님이 부르신다 싶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습니다.
이때 아내는 간신히 이룬 경제적 안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 힘들어 했고,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막상 목사가 되었을 때에는 풀타임 약사로서 일하면서 가계를 돌보았고, 제가 집안 일에
신경쓰지 않고 목회에만 전념하도록 내조를 했습니다. 저는 가계 수입이나 지출이 얼마인지를 몰랐습니다.
와이셔츠나 구두 사이즈도 몰랐습니다. 아내가 대신 다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로서 당연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4년의 암 투병 후 임종이 가까웠을 때, 아내는 자신보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가 더 걱정이었습니다.
밥을 어떻게 짓는지, 세탁기를 어떻게 돌리는지, 세금 보고를 어떻게 하는지, 면밀하게 설명해 주었고,
자신이 쓸 것도 아닌데 이전에 계획했던 다락 보수 공사까지 마쳤습니다.
당시에 아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을 몰랐다거나, 아내의 희생을 감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몰랐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비로서 알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만나서 안아주고,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앞으로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약속할 그날, 천국 갈 날을
고대하면서 삽니다.”

가족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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