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관하여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설교를 선포라고 보는냐, 설득이라고 보느냐 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설교를 선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말씀 선포’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설교를 선포라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은 자신을 세상을 향하여 진리를 외치는 예언자나 선지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받아서, 바르게 전하는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심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이사야 55:11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 오지 않는다." 이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대언하는 데 있고,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설교가 설득이라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은, 말하는 자신보다 듣는 청중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를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단어나 표현 방법을 청중에 맞게 선택하며, 이해를 돕는 적절한 예화를 찾습니다.
설교가 선포냐, 설득이냐?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에는 두 가지 면이 다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이든, 결신이든, 헌신이든,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설득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포와 설득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저는 설득 쪽을 택할 것 같습니다. 특히 대형 집회가 아닌 주일 연합 예배 설교는 설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자들은 기독교에 관해 문외한입니다. 복음에 무관심하고, 기독교 용어를 이해 못하며, 교회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며, 청중이 알아 듣기 어려운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여 ‘영적인’ 설교를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 가서 한국말로 설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청중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깊이 있는’ 설교를 하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 앞에서 고등 수학을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도 청중에 따라 접근 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비유를 많이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요 성경 전문가인 니고데모와 대할 때에는(요 3장) 접근 방법이 달라집니다. 직선적으로 말씀하시고, 도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종교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을 대할 때에는 접근 방법이 또 달라집니다. 강하게 꾸짖고, 질책하십니다(마 23:13-29). 반면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에는(요 4장), 매일 길어야 하는 우물물 대신에 콸콸 솟는 생수를 약속하신 후, 여인의 수준에 맞추어 한 걸음 한 걸음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청중에 따라 접근 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 광장에서 설교할 때에는(행 17장) 평소처럼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희랍 철학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청중이 유대인이 아니고 헬라 계통의 지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논리를 사용하여 복음을 풀어갑니다.
이 설교를 실패한 설교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아테네 교회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기록한 양피지는 당시 값비싼 귀중품입니다. 사도행전 필자인 누가가 실패한 설교의 예를 보여주기 위하여 이런 귀한 양피지를 낭비했겠습니까?
아테네 설교는 청중을 설득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설교를 조절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설교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설교 끝에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바울 편에 가담하여 신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었고, 다마리라는 부인도 있었고,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행 17:34).”
가정교회 3축 중의 하나인 주일 연합 예배의 목표는, 인간의 의지를 터치하여 결신하고 헌신토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교회 설교는 설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깨달아 주님으로 영접하도록 설득하고, 예수님 제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지 보도록 해서 그런 삶을 살도록 설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