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목회가 항상 재미있었습니다. 평신도 때도, 전도사 때, 부목사일 때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목회를 힘들어했습니다. 왜 그럴까? 부 목사 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유는, 담임 목사는 힘든 결정을 내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부목사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만 하면 되지만, 담임 목사님들은 교인들에게 힘들 수 있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합니다.
그러던 중 휴스턴 서울 교회 담임 목사로 초빙이 되었습니다. 이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담임 목회자가 되면 이제부터는 내게도 목회가 힘들어질까? 그렇다면 담임 목사 말고 부목사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주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주님이 담임 목사 되시고, 저를 부목사로 삼아주시면 제가 휴스턴 서울 교회로 가겠습니다.”
서울 교회에 부임한 이후 저는 자신을 부목사로 생각하고, 사역 목표를 담임 목사이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을 늘였습니다. 담임 목사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독대하는 시간이 길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 앉았을 때에 목회에 자유함이 생겼습니다. 목회 결과에 대해서 염려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담임 목사이신 주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을 해야하는데 일군이 없으면 안 했습니다. 예를 들어 찬양 예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몇 년 동안 찬양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인도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예배가 진정 필요하다면 담임 목사인 주님께서 찬양 인도할 사람도 보내주시지 않겠느냐는 뱃장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을 사역의 목표로 삼았다고 해서 주님의 뜻을 항상 100% 확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정 기간 동안 기도해도 100% 확신이 안 생기면 70-80%의 확신만 갖고 뛰어들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찾았는데 영성 부족으로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해 잘못된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주실 것이고, 아니면 내 진심을 보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설교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신학원에 다닐 때 설교학에서 C 학점을 받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설교가 저에게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설교 때문에 조바심을 하지는 않습니다. 전에는 설교를 통해 회중을 설득시키는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했었습니다. 설교를 잘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고, 청중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 같을 때에는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저는, 주님의 종이요 대변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청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로 준비하지만, 일단 단에 올라가 서면 청중 반응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결과가 있고 없고는 주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집회 초청을 받았을 때에도 참석 인원에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면, 전하려는 메시지가 필요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불러다 앉히실 것이고, 이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내 사명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저와 가정교회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123 기도 요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처음에는 조바심이 컸습니다. 교회와 목회자 가정의 어려움을 알고 나니까, 내가 기도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날인가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당연한 사실이 깨달음으로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들의 사정을 이미 알고 계신데 내가 조바심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편하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이 목회자 가정을 사랑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도를 하나 보탤 뿐입니다. 응답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러한 단순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셔서 제출한 기도 제목이 응답 받았다는 소식이 여기저기 들려옵니다.
제가 앓아 눕든지, 세상을 떠나면 가정교회 장래가 어떻게 될까? 이런 조바심도 사라졌습니다. 신약 교회 회복이라는 거대한 과업은 어차피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나는 그분을 수발드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이 가정교회 장래에 관해 지나치게 염려한다는 것은 건방지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녀들의 장래에 대한 조바심도 사라졌습니다. 부모인 나보다 우리 자녀들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마치 내가 자녀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처럼 투정을 부리며 기도하는 것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꾸준히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들의 앞길을 선하게 인도하시리라는 기대 가운데 편하게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주님의 종이 되고자 했을 때에 누리는 자유함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