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무실에 있는 러닝머신에서 일주일에 4번, 30분씩 걷기 운동을 합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운동을 하는데,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서 운동을 거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제가 즐겨 보는 드라마는 착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따뜻한 내용을 담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착하다 보니 복창이 터질 때가 있습니다. 음흉한 사람이 중요한 정보를 캐내려 할 때 감추어야할 것들을 순진하게 다 말해 버립니다. 사람 없는 외딴 곳에서 악한 사람에게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하지 못해”라고 솔직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합니다. 악한 사람이 코너에 몰렸다고 생각하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착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마 10:16).
지혜로워야할 예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개인에게 적용되는지, 공동체에 적용되는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시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 20:13). 이것은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이것을 적용하여 외적이 침범해 올 때에 싸우기를 거부하는 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극단적인 반전 주의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합니다. 만일 권총 강도가 들어와서 사랑하는 아내나 딸을 눈앞에서 성폭행하려 할 때에도 폭력을 거부하고 팔짱만 끼고 있을까?
사형제도도 그렇습니다. 찬성하는 입장에도, 반대하는 입장에도 성경적인 근거가 있고 논의는 계속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라고 했기 때문에 안 된다는 논리는 펼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 계명은 개인의 사욕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동체에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사형시키라는 명령도 십계명과 더불어 주셨습니다.
지도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순결과 뱀 같은 지혜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사람들 틈에 살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악을 모르고, 악한 사람을 분별치 못할 때에, 공동체에 파괴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마 5:39).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롯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품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손해 볼 수 있어야 하고, 이용당할 수 있어야 하고, 속아 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속아주는 것과 진짜 속는 것은 다릅니다. 알면서 속아주는 것은 순결한 것이고, 진짜 속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