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기 목사 예수 믿게 된 이야기
조부님이 목회자셨기 때문에 저는 선택권이 없이 어릴 적부터 교회 생활을 했고, 세례도 고등학교 2 학년
때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에 대학교 입학하여 (서울 공대 전자과) 안 믿는 친구들을 사귀면서 술
담배를 시작했고, 과우회장을 맡으면서 여대 학생들과 미팅 주선 하고, 급우들 선동해서 클래스 빼먹는
일에 앞장 서게 되면서 교회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해군에 입대하여3년간 복무하고, 1970년에 중위로 제대 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 공부를 하기 위하여 도미했는데, 대학원에 있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캠퍼스를 향해 걸어가다가 미국 전도 대원들이 길에서 나누어 주는 신약 성경책을 받았는데, 실험
끝내고 논문을 쓰고 있을 때라 시간 여유가 좀 있어서 성경을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설교도 많이 들었고, 신학책도 몇 권 읽었지만 성경을 통독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생전 처음 접하는 책 같았습니다. “성경에 이런 얘기도 있었나? 그러면 왜
목사님들이 이런 얘기를 안 해주었지?” 이런 느낌 가운데, 재미가 나서 신약 성경 전체를 사흘만에 다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데 저는 반대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난 후에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첫 번 부담감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거부감이었습니다. 나이도 당시 내 또래인 30대, 정규
교육도 받은 적이 없고, 직업도 평범한 목수이고, 막말로 외국에 한 번 나가 본적이 없는 사람인데, 말하는
것이 여간 건방지게 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모든 종교는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곳에 이르게 하는데,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는 너무나도 독선적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하나님)께로 갈 사람이 없다.” 세상에 이런 독선적인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을 읽은 후에 갖게 된 두 번째 부담감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난 당시에 병을
고치는 기적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이해 못하는 정신과 육체의 상관 관계가 있어서 “내가
낫는다” 혹은 “이분이 나를 고쳐준다” 강하게 믿으면 나을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식의 심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만화같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예수가 떡 5 덩어리로
5천명을 먹였다든지,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접지 못했던 것은 성경이 예수가 죽고 난 후, 25년에서 40년 사이에
쓰여졌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난 당시 예수에 관한 기록(신약 성경)은 예수가 죽고 난 후 200-300년
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이 죽고 나면 그의 행적이 과장되고 미화되면서
전설이나 신화가 형성되는 법인데, 신약 성경도 그런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25년에서
40년이면, 신화나 전설이 형성되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또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있을 때라 거짓이나 허위를 기록했으면 금방 탄로가 날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성경을 사실로 받아드릴 수도 없고, 던져버리지도 못하는 딜레마 가운데, 어떻게 기독교가 현대 4대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회교, 불교, 유교는 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했는지
설명이 됩니다. 회교는, 창시자 마호메트가 군사력으로 이웃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해 가며 포교 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큰 종교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불교도 석가모니께서 80세가 넘도록 포교 활동을
벌이면서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키웠기 때문에 확산될 수 되었습니다. 유교도, 공자가 유능한 석학들을
많이 키웠기 때문에 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30세에 포교 활동을 시작해서 딱 3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하여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고, 몇 안 되는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얘기는 여기에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가 끝나지 않고 4대 종교 중의 하나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 이것이 내 의문이었습니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직후의 상황을 좀 더 세밀히 살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장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답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문이 더해 갔습니다.
3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극적으로 바뀐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체포될 때 이들은 자신만 살고자 뺑소니쳤던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처형 당한지 얼마 안 되어. 예수의 적들이 우글우글하는
예루살렘 도시 한 복판에서 전도를 하는데,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비겁한 사람에서
용맹한 사람으로 돌변하게 만들었을까?
둘째는 이들의 메시지였습니다. 메시지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는 증명하기 위하여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포교 활동을 벌인다면 메시지를 받아드리기 쉽게 만들 것 같은데, 왜 어렵게
만들었을까?
셋째는 당황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자, 지도자들이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하면서 핍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러한 당국자들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 예루살렘 도시를 한 바퀴 돌면서 “예수
추종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데, 보아라. 예수 시체가 여기에 있지 않으냐?” 이렇게 하면 예수
추종자들은 할 말을 잃을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못할까?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습니다. 모든 종교 창시자들은 죽어서 무덤이 있는데, 예수님만은 무덤이 없습니다.
마호메트는 죽어서 메카에 무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도 세상을 떠난 후 화장을 해서 그 재를 여덟 군데
나누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공자도 죽어서 중국 청도 근교에 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무덤이
없습니다! 왜 무덤이 없을까?
이런 모든 의문을 단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비겁했던 제자들이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했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었고,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갖다 보일 예수 시체가 없었고.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종교 창시자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이, 죽은 후의 삶에
관해서는 이들도 나처럼 추측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진정 죽었다가 부활했다면 이 분은 죽은
후에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말할 자격을 갖고 있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저는 합리적으로,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