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입니다. 교인 한 분이 해외에 여행 후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새벽 일찍 잠이 깼습니다. 새벽 기도나 하자 싶어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 날 마침 그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즈음 휴스 톤에서 잘 나가는 교회 교인이 우리 교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왜 영이 살아 있지 않는 교회에 다니냐고요!” 이 성도는 목사님이 서울 침례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 성도들이 우리 교회를 자랑스러워하다 보니까 이런 투의 말을 하게 되지 않냐 싶다면서 조심하면 좋겠다는 내용의 이 메일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제가 잘 알고 존경하는 분입니다.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사과하는 이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답신을 보내면서,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서울 침례교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해석을 할 수 있는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극구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해에서 비롯된 에피소드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식의 오해가 자주 있습니다. 목사이지만 저도 제 삼자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듣는 수가 있습니다. 전에는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쉽게 말려들지 않습니다. 지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지혜는, 남의 판단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비난 듣는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서 그쪽 얘기를 듣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 얻어진 지혜가 있습니다. 비판 받는 사람 대신에 비판하는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 관하여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릴 때에는 둘 중에 누가 더 상대방과 가까이 생활하는지를 보아서 결정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성품이 따뜻하다고 하고, 멀리서나 보는 사람은 냉정하다고 하면, 가까운 사람의 평가를 받아들여 따뜻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또, 남을 비난하는 말을 들을 때에는 비난하는 사람과 비난받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믿을만한 사람인지를 봅니다. 비난하는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에 무게를 줍니다. 그러나 비난 받는 사람이 신뢰할만한 사람이면, 그 비난을 무시합니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존경할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비난하면, 자동적으로 상대방이 존경 받을만한 사람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