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한권 소개합니다. 신광은 목사가 저술한 ‘천하무적 아르뱅주의(포이에마 출판)’입니다. “아르뱅주의”는 인간의 선택을 강조한 아르메니우스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칼뱅의 이름을 합쳐서 저자가 만들어 낸 합성어입니다.
저자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께 회개했으니까 됐다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목회를 계속하는 것은 잘못된 신학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잘못된 신학을, 저자는 아르뱅주의라고 부릅니다. 아르뱅주의는 죄를 짓는 목사들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신학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비신자에게 전도할 때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메니우스 사상입니다. 순수 칼뱅 주의자들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인간이 의지로 결정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영접 기도를 한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 관계는 취소될 수 없다고 말하여 구원의 확신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기초한 칼뱅주의 사상입니다. 순수 아르메니안 주의자들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한 칼뱅 주의자나 철저한 아르메니우스 주의자들은 신학에 있어 정반대 입장에 서있지만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나님에게 택함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거룩한 삶을 통해서라고 믿고, 후자는,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하여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뱅 사상과 아르메니우스 사상을 편리하게 복합시킨 아르뱅주의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이 보장되기 때문에, 거룩한 삶은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는 선택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신학의 극단적인 예가 구원파들입니다. 구원파에서는 예수님을 한 번 영접하면 살인을 해도 천국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영접하는 순간 구원을 보장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뱅주의자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메니우스주의자들은 구원론을 놓고 오랜 동안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선택은 칼뱅주의와 아르메니우스주의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제 3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은 희랍 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을 둘 다 진리라고 말하는데, 초대 교부들이 희랍 철학의 과다한 영향을 받아 신학을 ‘명제화’하다 보니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복음은 ‘동사’며 ‘형용사’인데 희랍 철학의 영향으로 ‘명사’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저자는 제 3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삶’에서 가르치는 것이 제3의 선택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생명의 삶에서는, 단순하게 성경에 접근하자는 ‘성경대로’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를 둘 다 진리로 인정하고 받아드립니다. 둘 중의 하나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둘 다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과학을 통해 모순되는 두 가지를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봅니다. (자연세계는 영적 세계의 그림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고,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현대 물리학은 시작되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입자가 파동이 되고, 파동이 입자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하이젠버그의 불확정 원리에 기초하여,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조건 하에서는 입자처럼 취급하고, 어떤 조건 하에서는 파동처럼 취급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자연 현상이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자연 세계에서 상치되는 원리가 둘 다 맞을 수가 있다면, 영적 세계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당신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를 강조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여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당신을 부르셨다”를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삶 초반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미 구원 받았다”를 강조하고, 중반부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5년, 10년이 지나도 사고나, 성품이나, 생활에 변화가 없으면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한다”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 칼뱅의‘기독교 강요’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갖게 되는 많은 의문에 시원스러운 답을 주고 있어서 너무나도 좋습니다. 그런데 칼뱅이 너무 논리적으로 보여 때때로 불안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초자연적인 분이신데, 한 신학 체계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핵물리를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느낄 것 같은 거북함을 느낍니다.
구원론을 정립하기 원하거나, 기독교인들이 왜 도덕적인 불감증에 빠졌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