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멘토” <9.29.2011>

최영기모다카이브 2023.08.23 10:18:26

제 조부님, 최석모(崔錫模) 목사님은 서울 서대문 근처에 있는 아현 성결 교회를 23년간 목회하시고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순교하셨습니다. 성결 교단에서 6명의 순교자를 내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되셨습니다.

 

조부님이 납북되어 가실 때 저는 6세였기 때문에 조부님은 엄한 할아버지로 밖에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부님은 제 목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계십니다. 주위 분들이 조부님에 대하여 들려주시는 일화들을 통해 제가 어떤 목사가 되어야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휴스턴에는 암 연구로는 세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엠디 앤더슨 암센터가 있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저명인사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오는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고위 공직자나 큰 기업인이 저희 교회를 방문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이분들을 사회 직책을 붙여서 소개해 본 적이 없고, 특별대우를 해 본적도 없습니다. 제 조부님 일화 때문입니다. 제 조부님은 야고보서에서, 교회 안에서는 신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주일 예배 때에 가장 상석이라고 할 수 있는 맨 앞자리를 아현 시장 맹인 거지들을 불러다 앉히셨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휴스턴 서울 교회는 한어회중과 영어회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어 회중은 장년 출석이 약 400명인데, 한인 2세만이 아니라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된데도 조부님의 간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부님이 1940년대에 동양선교회 후원으로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으셨습니다. 동양 선교회 사역을 소개하고 후원을 부탁하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때 집회는 백인 교회에 가서 했지만 잠은 흑인 목사님 집에 가서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미국의 인종차별은 극심해서 화장실도 백인용과 흑인용을 구별할 때인데, 대단한 발상이요 용기입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습니다.

 

저는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고 대외 활동에는 별로 관심을 안 갖습니다. 이것도 조부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부님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씨와 한성 영어 학원을 같이 다녔습니다. 일본 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귀국하여 제일 먼저 찾은 사람 중의 하나가 조부님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남한은 미국 군정 밑에 있었기 때문에 영어 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장로님들 말로는 그때 초청에 응했으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에 엄청나게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조부님은 이 초청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 전파 사역을 아무리 나라 일이 급해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정교회 사역을 하게 된 것도 조부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정교회 운동의 핵심은 신약 교회를 회복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교 들어간 후에 교회와 멀어졌다가 미국에 유학하면서 30세에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당연히 제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된 후에도 성경은 당연히 제 목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성경에는 교회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데 왜 교회는 안 그런다가?” “성경에서 목회는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안 하는가?”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목회를 하고, 성경적인 성도를 만들어내어,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보자고 시작한 것이 가정교회입니다. 이러한 ‘성경대로’라는 고집은 성경대로 살려고 애쓰시다 마침내 순교하신 조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머리에 그리는 이상적인 지도자 상은 침몰하는 배의 함장입니다. 배가 침몰할 때 선원들을 다 대피시키고 장열하게 배와 더불어 함몰하는 함장의 모습입니다. 이런 지도자의 상도 조부님에게서 얻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된 후 유엔군이 참여하고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서울 탈환을 앞두고 성결 교단 청년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교단 장래에 관한 긴급회의가 있다고 조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조부님은 아침도 들지 않으시고 급히 옷을 차려 입고 나가셨습니다. 이것이 가족들이 조부님을 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조부님은 이미 유서를 써 놓으셨습니다. 이런 일을 예견하시고 순교의 길을 받아드리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셨던 조부님은 저에게 영원한 멘토가 되고 계십니다.